[김호기의 세상을 뒤흔든 사상 70년] (8) “과학 발전은 ‘혁명적’으로 이뤄진다”…인류 지식체계에 충격파
기사입력 2016.04.27 21:32
최종수정 2016.04.27 23:31
ㆍ토머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

아무리 위대한 학자라 하더라도 그 영향력은 주로 자신의 전공과 이웃 학문 분야로 제한된다. 지난 20세기 후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학자를 꼽으라면 그는 미국 과학사가이자 과학철학자인 토머스 쿤(1922~1996)일 것이다. 대학에 들어와 무엇을 전공하든 익히는 개념의 하나가 패러다임이다. 쿤이 <과학 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1962)를 통해 주조한 패러다임 개념과 이에 기반한 과학철학은 우리 인간이 발전시켜온 지식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과학 혁명의 구조>를 발표할 즈음 과학철학의 안과 밖에서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안에서는 이론의 주관적 접근과 비교·실험의 객관적 방법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견해들이 나타났고, 밖에서는 인간과 사회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구조적 단절의 발상을 중시하는 이론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쿤은 혁신적인 과학관을 제시했고, 이는 자연과학은 물론 인문·사회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구글 학술 검색에 따르면, 2013년 현재 <과학 혁명의 구조>는 20세기에 출판된 책과 논문 가운데 가장 많은 5만8000회 이상 인용됐다.

토머스 쿤은 과학의 발전은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교체에 의해 혁명적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패러다임과 과학 혁명

<과학 혁명의 구조>는 과학의 역사에서 나타난 과학 혁명과 그 위기를 주목함으로써 과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한다. 쿤은 과학의 진보가 누적적으로 이뤄진다는 기존의 과학관과 다른 새로운 과학관을 제시했다. 과학적 지식의 발전은 과학 혁명이라는 전환을 통해 이뤄진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과학 혁명이란 한 패러다임이 그것과 양립 불가능한 다른 패러다임에 의해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대체되는 비누적적 에피소드들을 말한다.


쿤에게 패러다임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광의의 패러다임이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신념·가치·기술 등을 포괄한 총체적 집합을 뜻한다면, 협의의 패러다임은 그 집합의 한 구성 요소인 문제 해결 사례에 해당하는 범례를 의미한다. 이 패러다임은 쿤 과학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그는 한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받는 과학자들의 활동을 ‘정상 과학’으로, 한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으로 교체되는 현상을 ‘과학 혁명’으로 개념화했다.

토머스 쿤의 대표저작 <과학혁명의 구조>


이러한 개념들에 기초해 쿤은 과학의 역사에 대해 대담한 견해를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과학사에는 ‘정상 과학’ 시기와 ‘위기’ 시기가 반복해 왔다. 다시 말해, 새로운 이론들을 추구하지 않는 정상 과학은 변칙 사례들이 누적되면 위기에 도달하며, 이때 새로운 이론들이 정립되면 기존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되는 과학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확립된 후 전통적인 시공간 이론이 의미를 상실한 것은 패러다임 교체의 대표적인 사례다.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제시된 개념들에서 가장 큰 논란을 이룬 것은 ‘통약불가능성’이다. 패러다임이 다르면 세계관, 개념 체계의 구성, 문제 파악 방식이 다르고, 개념이 지칭하는 대상조차 달라진다. 상이한 패러다임들은 비교할 수 없고 공통분모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통약불가능하다. 이러한 쿤의 주장은 한편으론 상대주의 과학관의 출발점을 제공했지만, 다른 한편에선 결과적으로 과학의 절대적인 진리성을 부정하는 함의를 담고 있었다.

■<과학 혁명의 구조>를 둘러싼 논쟁

<과학 혁명의 구조>는 자연과학은 물론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일파만파의 반향을 일으켰다. 흥미로운 것은 쿤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환영한 분야가 자연과학보다는 인문·사회과학이었다는 점이다. 쿤이 책의 머리말에서 주목한 장 피아제의 심리학과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볼 수 있듯, 당시 인문·사회과학 안에서는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는 데 구조적 단절과 전체론을 중시하는 이론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주의적 인문·사회과학에 쿤의 과학철학은 중요한 철학적 논거를 제공했다. 쿤의 과학철학은 미셸 푸코의 지식 고고학,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지속 역사학,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자본주의 세계체제 분석과 이론적 친화성이 높았다.

<과학 혁명의 구조>를 둘러싼 가장 뜨거운 논쟁은 1965년 영국 런던에서 진행됐다. 1970년 <현대 과학철학 논쟁>(원제 Criticism and the Growth of Knowledge)이란 책으로 나온 이 논쟁에 참여한 주요 학자들은 토머스 쿤, 칼 포퍼, 임레 라카토시, 폴 파이어아벤트 등 당대 과학철학을 대표하는 이들이었다.

포퍼는 쿤의 주장이 과학의 실제 역사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상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선 탐구의 심리학이 아니라 ‘반증’ 원리에 기초한 발견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카토시는 반증이 누적되면 패러다임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파악해 쿤 이론과 포퍼 이론의 절충을 시도했다. 파이어아벤트는 쿤보다 더 급진적으로 과학자 사회를 지배하는 어떤 규칙도 인정하지 않는 무정부주의적 과학관을 제시했다.

현재의 시점에서 <과학 혁명의 구조>는 과학을 바라보는 인식에 가히 혁명적 변화를 가져다준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자연과학자 그룹과 쿤의 철학을 따르는 쿠니안(Kuhnian) 그룹 사이에 벌어진 ‘과학 전쟁’은 쿤의 과학철학이 지식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였다. 오늘날 패러다임과 과학 혁명에 대한 쿤의 과학철학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자연과학자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쿤을 통해 과학이 특별한 위상을 가진 지식이 아니라 여러 지식 또는 문화 가운데 하나라는 인식에 도달한 지식인들 또한 적지 않다. 한 권의 책이 인간과 세계 인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 <과학 혁명의 구조>에 필적할 만한 저작을 찾기 어렵다.

■한국어판 저작은

쿤이 1969년에 쓴 ‘후기’를 포함한 <과학 혁명의 구조>(1970) 재판본은 조형(이화여대 명예교수)과 김명자(전 환경부 장관)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다. 출간 50년을 기념한 제4판(2012)은 김명자 전 장관과 홍성욱 서울대 교수에 의해 우리말로 유려하게 옮겨졌다. 이 판본에는 이 책의 의의에 대한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의 ‘서론’이 실려 있다.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칼 포퍼, 과학철학으로 현대 사회와 민주주의 성찰

칼 포퍼와 토머스 쿤은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과학철학자들이다. 두 사람의 연구 결과를 잘 정리한 책이 장대익 서울대 교수의 <쿤 & 포퍼: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이다. 이 책은 적잖이 어려운 쿤과 포퍼의 과학철학을 간결하면서도 설득력 높게 전달한다. 특히 ‘제3장 쿤의 법정’은 상호 토론 방식을 통해 포퍼, 쿤, 라카토시, 파이어아벤트 철학의 차이를 흥미롭게 펼쳐 보인다.

장대익은 책의 마지막에서 과학 자체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과학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이공계 학생들이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 혁명을 이끈 과학자들이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사회학을 전공하는 내가 보기에 포퍼와 쿤의 과학철학은 사회과학 분야 학생들도 배워야 한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 칼 포퍼는 토머스 쿤과 함께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과학철학자이다.


사회과학 방법은 자연과학 방법에 작지 않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포퍼와 쿤의 착상은 사회과학의 이론 구성에 지적 자극과 통찰을 선사한다.

쿤과 달리 포퍼는 자신의 이론에 입각해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표명해왔다. 1945년에 발표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그의 정치사상을 선명히 보여준 저작이다.

그는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를 ‘열린 사회의 적’들로 파악한다. 세 사람의 철학은 법칙에 따라 역사가 발전한다는 목적론적 이론이며, 이런 반증불가능한 논리는 ‘닫힌 사회’인 전체주의를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포퍼가 제시하는 ‘열린 사회’란 이성의 한계를 자각한 인간들이 그 어떤 사상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렇듯 현대 과학철학에 담긴 문제의식은 현대 사회와 민주주의를 성찰하는 데 매우 중요한 함의를 안겨준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상대주의는 다원주의의 철학적 출발점을 제공한다.

문제의 핵심은 상대주의가 갖는 양면성에 있다. 상대주의는 한편에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풍요롭게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무정부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상대주의가 어떤 ‘자기 제한성’을 가져야 할 것인지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부여된 매우 중대한 과제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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